친구가 보내온 멀리 덩굴 사진. 내 기억 속 새왓디의 가냘픈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이 낯선 모습은 어쩌면 들판의 환경이 변하면서 달라진 멀리의 현재일지도 모른다. 진짜 내 기억 속의 멀리를 만날 때까지 잠시 이 사진을 빌려 쓴다.(이미지 출처: 양종식, 2025.11.9.)
친구가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내가 부탁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우리 동네 목장을 지나던 길이었다.
늦가을 햇살이 목장 ‘서녁짝이’ 언덕을
비스듬히 비추고,
바람은 아직 단풍이 들지 않은 벚나무 잎을 긁으며
서성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돌담 한편에 얽혀 있는 덩굴 하나가 내 눈에 띄었다.
그것은 어릴 때 보았던 ‘멀리’(머루; 산포도)였다.
하지만 나는 그냥 지나쳤다.
한참을 지나왔는데 문득 뒤돌아보니 “아차!” 싶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 기억에서 되살아난
‘멀리’의 풍경이었다.
50년 전 가을, 제주 들판의 바람 소리에
흔들리는 가느다란 줄기는
새왓디의 새(띠茅)에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멀리’였다.
그리움이 밀려와,
시간 속에서 문득 되살아난 그 풍경을
현실 속에서 붙잡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멀리’를 찍어오라고
친구에게 강요한 것이다.
그러나 친구가 찍은 것은 그 ‘멀리’가 아니었다.
나중에 목장 그 자리에 갔더니
그 ‘멀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멀리’를 보면 마음속에서 오래된 시간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입안에서 콩알만한 크기의 스치듯 사라지는 멀리의 맛은 짧았지만,
그 풍경은 50년의 시간을 건너 여전히 생생하다.
사진 속 ‘멀리’는 담장 위에서 가을빛을 머금고 있다.
들판의 바람을 오래 기억해온 듯 마른 덩굴 하나가 하늘로 뻗어 있고,
그 끝에는 보랏빛인지 검은빛인지 모를 작은 열매들이 매달려 있다.
그런데 어디선가 밀려온 흔적이다.
“어디선가 밀려온 흔적”은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물리 법칙이 시공간을 가로지르며 이곳으로 이동해 온 결과다.
우리는 그 흔적을 통해 보이지 않는 이동 경로를 역추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저곳은 우리 동네 산산모루 ‘동녁편이’ 누군가의 감귤원 돌담 ‘우티’다.
당초에는 산산모루 ‘우녁편이’ 새왓디에서
산산한 가을 바람을 맞으며 평화로운 삶을 이어가고 있었을 터였다.
한때 제주 들판의 새왓은 ‘멀리’가 몸을 기대던
자연의 구조물이었고,
‘멀리’는 그곳에서 새(띠茅)를 움켜쥐고
바람을 타며 자랐다.
띠 지붕의 재료가 되던 새왓은 생태적 ‘지지대’로서
‘멀리’의 덩굴이 공간을 확장하도록 도왔다.
옛날 새왓은
그저 초가 지붕을 이는 띠茅 만을 뜻하지 않았다.
그곳은 멀리가 몸을 기대던 자연의 지지대였고, 들판의 생태계가 숨 쉬던 공간이었다.
그러나 제주 들판이 감귤원으로 바뀌면서,
‘멀리’가 서식하던
‘미세 서식처’는 거의 사라졌다.
‘멀리’는 어디론가 조용히 물러났다.
경작지 개간은 제주 건조지대의 관목·덩굴 식물의 다양성을 감소시킨다는
생태 연구가 여러 차례 보고되었다. 1)
‘멀리’ 같은 야생 포도류 역시 그 범주에 속한다.
새왓은 더 이상 없고,
결국 ‘멀리’는 돌담·울타리·밭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멀리’는 거기 그 자리에서 생존인지 도피인지 모를 선택을 이어갔다.
친구가 보내온 멀리 덩굴 사진은 ‘왕머루(Vitis coignetiae)’일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내가 기억하는 ‘멀리’는 이 머루가 아니다. (사진 출처: 국립생물자원관이 제공하는 한반도 생물다양성 정보 서비스로, 국내 생물종의 분류·분포·생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한반도의 생물다양성 )
그럼에도 ‘멀리’는 가을 하늘 아래에서
여전히 열매를 맺고 있다.
식물에게 열매 맺기란
번식을 포기하지 않는 생리적 본능이자,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보내기 위한 전략이다.
그러나 이미 사라진
가을 들판의 새왓디 ‘멀리’는
나에게는
어릴 적 모든 것을 한꺼번에 떠올리게 하는
‘기억의 표본’이지 식물의 ‘열매 맺기’와는 무관하다.
‘멀리’의 맛이
기억하는 것은 감각아 아니다. 장소와 정서다.
2)
비록 ‘멀리’의 맛은 잊혀졌지만
가을 들판의 아름답고 자유로운 풍경,
새왓디의 바람은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새왓디에서 띠茅을 거두고,
그 띠와 함께 거두어진 ‘멀리’를
마차에 실어 오던 그 길,
그 정겨운 풍경이 그립고, 그 그리움에 겨워
울고 싶다.
사진 속 멀리는 단순한 열매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사라진 들판에,
내 어린 시절 기억이 남긴 흔적이다.
주(註)
1) 제주 중산간의 개간은 야생 식물의 서식 면적을 줄이고 단절시킨다. 생태학의 종-면적 관계(Species-Area Relationship, SAR) 법칙에 따르면, 서식 가능한 면적이 줄어들수록 그곳이 유지할 수 있는 종의 수도 거듭제곱 관계에 따라 감소한다.
생태학자 Arrhenius가 정립한 법칙에 따르면, 특정 생태계의 면적($A$)과 그곳에 서식하는 종의 수($S$)는 거듭제곱의 관계를 가진다.
$S = c A^z$
여기서 $c$와 $z$는 생태적 상수이다. 제주 중산간의 새왓이 감귤원과 농경지로 개간되면서 야생식물이 이용할 수 있는 서식 공간도 축소되고 단절되었다. Arrhenius의 종-면적 관계 $S = c A^z$가 보여주듯, 일반적으로 서식 면적이 감소할수록 그 공간이 유지할 수 있는 종의 수도 감소한다. 돌담과 밭 가장자리에 간신히 남아 있는 멀리는 이러한 서식지 축소 속에서 살아남은 잔존 개체로 볼 수 있다. 종–면적 관계(Species–Area Relationship, SAR)를 이용해 서식 면적과 종수의 관계를 설명하고, 서식지 감소가 종 손실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전생태학의 관점에서 다룬 논문이다. 일반적인 관계를 S = cA^z 형태의 거듭제곱식으로 설명한다. Climate change, species–area curves and the extinction crisis 스웨덴 생태학자 Olof Arrhenius가 1921년 발표한 고전 논문으로, 조사 면적이 증가할수록 발견되는 종수도 증가한다는 종–면적 관계를 정량적으로 제시한 초기 연구다. 오늘날 S = cA^z로 표현되는 종–면적 관계의 역사적 원전이다. Species and Area 고전적인 종–면적 관계를 S = cA^z로 표현하고, 종수(S), 면적(A), 그리고 관계의 형태를 결정하는 상수 c와 z의 의미를 설명한다. 종의 풍부도와 공간적 분포가 종–면적 곡선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연구다. Species–area relationship: separating the effects of species abundance and spatial distribution ↩
2) 시각 정보는 대뇌피질을 거쳐 분석된 후 기억으로 저장되지만, 후각과 미각 정보는 감정과 기억의 중추인 대뇌변연계로 직행한다. 50년 전 멀리의 맛이 논리적 사고 과정을 건너뛰고 즉각적으로 과거의 풍경을 소환하는 것은 뇌의 해부학적 경로 때문이다.
연구에 따르면, 후각은 다른 감각과 달리 시상을 우선적으로 거치지 않고 후각피질을 통해 편도체와 해마 등 감정·기억 회로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미각은 뇌간과 시상, 섬엽을 거쳐 처리되지만 후각과 결합해 음식의 풍미를 구성하면서 감정과 기억 회로를 강하게 활성화할 수 있다.
이것이 “맛이 풍경을 기억하는” 현상의 신경과학적 실체이다. 냄새가 시각이나 언어적 단서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 강하게 불러오고, 더 강한 ‘과거로 돌아간 느낌’과 정서적 경험을 동반할 수 있음을 정리한 리뷰다. 이른바 프루스트 현상(Proust phenomenon)의 대표적인 신경심리학적 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 Autobiographical odor memory 후각 정보가 후각망울과 일차 후각피질을 거쳐 감정과 기억에 중요한 편도체·해마와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점을 설명한다. 다른 감각과 달리 이 연결 과정에서 시상을 우선적으로 거치지 않는다는 해부학적 특징이 냄새가 강한 기억 단서가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로 제시된다. A review on the neural bases of episodic odor memory 후각계가 편도체, 해마, 섬엽, 앞대상피질, 안와전두피질 등 감정 처리와 관련된 여러 뇌 영역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정리한 리뷰다. 냄새가 감정과 기억을 강하게 결합시키는 신경해부학적 배경을 설명하는 자료다. Olfactory system and emotion: common substrates 특정 냄새가 개인의 과거 경험을 갑작스럽게 불러오는 ‘프루스트 현상’을 검토한 연구다. 후각 단서가 다른 감각 단서보다 자서전적 기억을 효과적으로 소환할 수 있다는 실험적 근거를 논의한다. Odour-evoked autobiographical memories: psychological investigations of proustian phenomena 미각 정보는 뇌간의 고립로핵에서 시상의 미각 영역을 거쳐 섬엽의 미각피질로 전달되며, 이후 후각·시각·보상 정보와 통합된다. 따라서 미각이 후각처럼 시상을 건너뛰어 변연계로 곧바로 ‘직행한다’고 표현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Taste and smell processing in the brain ↩
